키워드: 미로

나는 지금 달리고 있다. 어두운 하늘에는 회색 구름에 가려져 어슴푸레 보이는 달만이 떠있다. 하지만 내게 그걸 쳐다볼 시간은 없다. 나는 달리고, 또 달린다. 출구를 알 수 없는 이 미로 속에서 나는 멈출 수가 없다. 이미 몇 번이고 넘어진 내 무릎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고, 바닥을 짚었던 손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린 다리는 힘이 풀려 다시 넘어진다. 하지만 역시 나는 멈출 수가 없다. 출구도 알 수 없는 이 미로에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앞도, 뒤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왔던 곳 조차 알 수 없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달릴 수밖에 없다. 잠시라도 멈춰서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내게 절망을 속삭인다. 그래, 뒤에 있는 ‘무언가’에게 잡히면 영원히 미로 속에서 어둠과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확신이었다. 또 다시 힘이 풀리며 넘어진다. 무어라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일어나기 위해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지만 생채기가 가득한 손바닥이 아픔을 토하며 덜덜 떨린다. 그럼에도 일어서려 하지만, 이번에는 다리가 휘청거리며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주저앉는다. 소리가 커진다. 눈물이 터져 나온다.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온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나는 절망만을 느낀다. 어떻게 이 미로의 입구로 들어왔는지 알 수 없다. 얼마나 걸었는지도 알 수 없다. 얼마나 출구에 가까워졌는지도 알 수 없다. 출구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다. 아니, 출구가 없는 미로에 갇힌 기분이었다. 해답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속삭이는 소리가 커지며 이제는 발소리까지 들린다. 저벅저벅이 아닌 추벅추벅. 비가 내리지도 않았고 땅은 젖어있지 않았는데도,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웅덩이에 빠진 발소리와 같다. 마치 끈질긴 늪에 갇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 뒤에서 오는 ‘무언가’에 잡혀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 나는 이미 뒤에서 오는 것에게 잡혀있는 사냥감일지도 몰랐다. 나는 일어서길 포기했다. 결국 이 미로에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출구도 알 수 없는 이 미로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까지 달려와도 끝이 어디인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 모든 걸 포기한 나는 미로에 기대어 달만을 바라본다. 목소리의 주인이 어서 빨리 다가오기를 바랐다. 구름에 가려졌다가 보였다가를 반복하는 달이 나를 비웃는 것만 같다. 그래, 비웃음. 그럴만하다. 나조차 나를 비웃고 있으니까. 미치광이처럼 웃음이 나왔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았나. 무엇을 위해 달린 건가. 결국 끝이 미로 속에서의 죽음인 걸. 아니, 내가 해낸 것이 있긴 하던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몇 번이고 노력해도 되는 건 없었다. 그래, 결국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못난 인간으로 미로 속에서 죽는 거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만 같다. 목소리의 주인이 어서 도착하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도착하지 않는다. 아니, 속삭이던 목소리, 걸어오던 발소리가 모두 멈추었다. 조용하다. 어째서? 나를 찾는 걸 포기한 건가? 나는 내가 왔던 길을 쳐다본다. 그리고 놀란다. 누군가 있다.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려움에 손끝이 떨린다.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뒤로 물린다. 하지만 이내 그 누군가가 다가오지 않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만 있다. 검은 인형처럼 보이는 ‘그’는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질문한다. “어째서 나를 쫓아온 건가요?” ‘그’는 답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한 번 질문한다. “나를 죽이려고 쫓은 게 아닌가요?” ‘그’는 가만히 서 있다. 내가 다시 한 번 질문하려 할 때 ‘그’가 손을 들어올린다. ‘그’는 한 방향을 가리킨다. 나는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다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릎을 짚으며 천천히 일어선 나는 질문했다. “어디로 가라는 건가요?” ‘그’는 답하지 않는다. 잠시간의 정적이 나와 ‘그’를 지나가고, 끝내 ‘그’가 입을 연다. “달려”나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너는..?” 그때, ‘그’가 다시 한 번 말한다. “달려” 나는 주춤거리며 ‘그’에게서 물러선다. ‘그’가 점점 더 큰 소리로 반복해서 소리친다. “달려, 달려, 달려, 달려! 달려! 달려!!” ‘그’의 분노한 듯한 목소리가 내 심장을 파고든다. 나는 계속 뒤로 물러나다 이내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그’가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달려!! 더 빨리!” 무섭다. 달려야 한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뒤에서 따라오는 ‘그’에게 어떻게든 잡히지 않기 위해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분명 죽음을 각오했음에도 다시 달린다. 달이 환해진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걷혔다. 이제 하늘에는 환한 달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이 나를 향해 웃어주는 것만 같다. 비웃고 있지 않았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리며 달리고 또 달린다.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 포기하지 말라는 거다. 자신에게 잡히지 말고 어떻게든 출구로 나가라고. 이 미로 속에서 끊임없이 탈출할 방법을 찾으라고 말하는 거다. 그래, 나는 뒤에 있는 자에게 쫓기고 있던 것이 아니다. 뒤에 있는 ‘그’의 목소리와 발소리를 이유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던 것이다. 나는 사냥감이 아니다. ‘그’를 발판으로 만들어 딛고 올라서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이다. 앞이 보이기 시작한다.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미로의 탈출구를 알 것만 같았다. 나는 달렸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사라진다.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그곳으로 달린다. 끝내, 미로의 바깥으로 한 발자국을 내밀었을 때, 목소리가 들린다. “잘가”. 고개를 돌린 나는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 안녕”. ‘그’는, 아니, 과거의 ‘나’는 나를 붙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길이었던 것에 불과했던 거다. 다시 앞을 보자 환한 빛이 눈을 가리다가 걷히기 시작한다. 오 미터 가량 떨어진 정면에 또 다른 미로가 보인다. 그래, 미로가 보인다. 더 이상 어둠이 나를 가리고 있지 않았다. 은행나무로 만들어진 미로가 내게 환영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어둠은 내 시야를 가리지 않았고, 뒤에서 쫓아오는 ‘무언가’는 없다. 미로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두렵지도 않다. 절로 웃음이 나온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은행나무 미로 속으로 발을 들였다.

_뭉친 달볕

<aside> 🐝 뭉클’s comment 뭉친님만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미로! 몰입하며 즐겁게 읽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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