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이태원

안녕, 갑자기 뜬금없이 웬 편지인가 싶지? 뭐, 우리가 별 일이 있어야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인가..라고 하기엔 내가 연락을 잘 안하는 편이긴 하지.. 별 건 아니고, 좋아하는 여성작가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을 방금 다 읽었거든. 이 감흥이 사라지기 전에 나도 누군가에게 편지를 한통 써야겠다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좀 낯간지럽지만 기억나? 작년 10월의 넷째주 금요일. 마침 네 생일 다음날이라 나는 너에게 작은 선물을 안겨주고 너는 그 선물보다 빛나는 웃음을 지어보였던 그날. 진짜 재밌었는데. 20대 후반이지만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김없이 핸드폰이 울리는 K-딸인 우리가, '생일+할로윈'이라는 좋은 핑계로 모처럼 허락을 받고 새벽까지 놀았잖아. 마침 코로나도 끝나가서 예전에 자주가던 클럽도 갔고, 길거리를 거닐면서 누가누가 할로윈에 진심인가 겨루기라도 하듯 분장에 열을 올린 사람들 구경도 했지. 근데 그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봐. 다음날 저녁까지 정신이 안차려지더라? '금요일이라고 너무 어제만 살 것처럼 놀았네..'하고 후회하면서 무거운 몸을 뒤척여 비몽사몽 너한테 연락을 했어. 그날도 어제와 같은 곳에서 약속이 있다는 네가 생각나서.

"난 죽을 거 같은데 잘 놀고있어? 넌 진짜 강철이다.." "우욱-"

이게 도대체 몇번째 토였는지.. 이제는 나오지도 않는 것들을 게워내곤 끙끙대다 잠이 들었어. 너도 알지? 원래 내가 잠을 좀 깊게 못자잖아. 게다가 숙취까지 있었으니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5시쯤 눈이 떠졌어.

그 뒤로는 기억이 잘 안나네. 한동안 멍하게 지낸거 같아. 며칠이나 지냈을까. 보다못한 G가 연락해서 나를 자주 집에서 꺼내줬는데, 그때는 짜증났어도 지금 생각해보면 꽤 도움이 됐던거 같애. (G 알지? 걔가 좀 집요하잖아..) 근데 그렇게 정신을 차리니까 그게 생각이 나더라. 우리가 금요일에 경리단길에서 이태원역 근처에 가려고 택시에 탔을때. 젊은 여성 기사님이 많은 인파로 한바퀴 굴리기도 어려운 차를 이끌면서 한숨을 내쉬면서 하신 말 있잖아.

"내일은 절대 이태원에 오지 마세요. 근처에 얼씬도 하면 안됩니다."

표정은 진지했지만 그때는 그냥 흘리듯이 내뱉으면서 장난치신거라고 생각했는데, 회상할수록 떨리는 목소리로 기억되는거야. 답답하고 찝찝해서 한동안은 그 기사님을 찾아다니기도 했어. 뭔가를 알고 계셨던 거냐고,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냐고 여쭤보려고. 말도 안되는건 나도 알고 있었어. 근데 참 신기하지. 그날 그 시간에 이태원에 간 젊은 여성 기사분은 없다는 거야. 사건이랑 연루되기 싫어서 숨으신건가 하고 이해하려다가도 속상하고 그래. 만약에, 정말 만약에 뭔가 알고계셨다면 그 한마디 말보다 더 강력한 경고를 주시지. 그럼 뭔가 찜찜하게 생각한 내가 다음날 너의 이태원행을 말리거나, 겁이 많은 네가 다음날 만나기로 한 친구들을 설득해 이태원이 아닌 곳에서 놀았을 수도 있잖아. 이렇게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지만..

그러고보니 너를 찾아갈 날이 3개월 정도밖에 안 남았네. 시간이 참 빠르다 싶다가도 너를 잃은 세월이 1년도 되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기도 해. 이 편지는 그때 가서 직접 전해줄게. 아, 나는 내일 G가 사는 청주에 놀러갈거야. 맨날 멀다고 안갔더니 G가 엄청 서운해하더라고. 알아보니까 그나마 빨리 갈 수 있는 버스가 있어서 이번엔 진짜 가겠다고 했어.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건데, 하필 내일 비가 엄청 많이 온다더라..? 내가 이래. 날을 잡아도 참..

아무튼.. 즉흥적으로 쓴 편지라 아무말이나 한거 같네. 민망해서 전해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곧 갈게. 잘자고 있어. 안녕. 2023년 7월 14일 금요일. 보고싶은 H가.

2023년 7월 14일 금요일. 보고싶은 H가.

<aside> 🐝 뭉클’s comment 뭉친 브랜디 님께서 본 글에 대해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픽션이라고 명시해주신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2022년 10월 29일의 참사, 뭉클 댕민도 그날 그곳에서 가까운 지인을 영영 잃었기에, 글 속의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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