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알츠하이머

제목 : 큰이모

엄마가 막내였으므로 남매 중 첫째인 이모와의 나이차이는 엄마와 나의 나이 차이보다 더 많았다. 한마디로 할머니만큼 나이가 많으신 이모였다. 귀여운 막내동생의 아들인 만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조카라는 것은 나를 대하는 이모의 모든 행동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1시간이 넘는 배차간격을 가진 시골버스를 타고 덜컹거리는 신작로를 따라 시골마을 이모의 집에 가는 길조차도 얼마나 신나고 즐거웠는지 돌이켜보면 유쾌하던 기억이다. 집안에 약수터와 우물이 있던 그 시골집에서 당신의 조카를 위해 키우던 닭을 잡아서 삶아주시던 이모가 치매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30대의 중반쯤이었다. 어머니도 60이 넘었으니 이모는 이미 90이 가까운 나이였다. 금슬이 얼마나 좋으셨는지 이모부가 치매에 걸리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사촌들은 치매에 걸린 이모와 이모부 두 분만을 고향시골에 둘 수 없어 청주의 아파트를 구해 모시고 보호사들을 채용해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사촌들도 틈틈이 찾아오고 열심히 간병을 하였다.

나는 치매에 걸린 이모를 찾아뵙는 걸 참 좋아했는데, 어린 시절 나를 극진히 대해 주었던 이모의 기억 슬픈 일이 있으면 누구보다 먼저 눈물을 흘리던 감성적인 이모의 모습들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날인가도 시간을 내어서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청주까지 이모를 만나러 갔는데 이모는 치매치고는 나쁜 편은 아니어서 대소변은 잘 못 가리셔서 기저귀를 차고 계시긴 했지만 행패를 부린다거나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원래 성품 자체가 그런 분이었다. 사실 대화를 나누면 이분이 치매가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몇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멀쩡해 보이는 상태였다. 몇 몇 가지를 생각해보면 나보다 60살 가까이 많으시던 이모가 어린애 같다는 느낌을 받아 나는 이모를 더 사랑할 수 있었는데 식사를 방금하고 간식을 방금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뭘 먹었냐고 자꾸 질문을 하시던 모습이 그 첫째였으면 나에게 금전적 손해를 크게 입힌 두 번째의 사건은 돈좀줘라 에피소드인데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이모가 나에게 얘기한다. "이모 용돈 좀 줘라." 그러면 나는 이모에게 "당연히 드려야죠." 하며 5만원을 쥐여 드린다. 그러면 조금 있다가 또 돈을 달라하시고 나는 또 드리고 몇 번 이러다 보면 사촌 누나들이 그만 달라고 하라고 많이 드렸다고 하고 이모는 받은 적 없다면 또 달라고 하기를 반복하여 한두시간 사이에 백만원이 넘는 돈을 용돈으로 헌납하기도 하지만 아깝게 느낀적도 없다.

그렇게 이모 얼굴을 뵐 때면 먼저 간 나의 동생은 왜 같이 안 오냐고 기억력은 그가 죽은 것을 잊어버렸으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는지 동생도 데려오라면서 보고 싶다면서 그렇게 서럽게 우시던 이모를 기억한다.

그렇게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시간을 지나고 나오면 내가 드린 그 돈들 중에 십만 원을 다시 건네주면서 휴게소에서 맛있는 것 사 먹고 조심해서 운전하라던 이모님. 어머니가 울면서 전화를 한다. 이모가 돌아가셨단다. 참 좋아하던 이모였는데 출장 중에 돌아가신 이모를 찾아갈 수 없는 상황이기에 아쉽게 보내드렸다. 이모와 엄마의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사촌누나들이 엄마의 또래이며 그중에는 엄마의 동창도 있어 지금도 여전히 친구처럼 만나고 있기에 나도 자주 누나들을 만나다 보면 또 이모가 생각난다. 떠났지만 그분이 남긴 당신과 똑 닮은 외모를 가진 두 누나들. 우리는 이야기한다. 가족력이 있어서 우리도 치매에 걸릴 수 있으나 이모처럼만 걸리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아마도 그분은 병도 남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않을 수준으로만 컨트롤 하셨을 거라고...

이모를 찾아가는 탈탈거리던 신작로도 이제는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_뭉친 빈츠

<aside> 🐝 뭉클’s comment 뭉친 빈츠 님 벌써 백일장 이관왕…! 빈츠 님의 글은 늘 생생한 묘사로 읽는 뭉클도 절절한 마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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